"Access to the seowon and its meaning from the19th century Korean-Chinese seowon data -Focused on Gyeongju Oksanseowonand Guangzhou Gwang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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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서원들 가운데 한국의 서원은 방문객의 명단을 별도로 정리하여 관리해왔다. 그러나 여타 국가에서는 이러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방문객의 수와 신분 등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入院하여 과거를 준비하였던 학생들의 명단이 일부 남아있어서 서원을 출입하였던 인물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설립된 중국 廣州의 廣雅書院 《동사록》과 《동성제생하계공과부》를 보면 省내 각 주ㆍ부ㆍ현의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입원하여 일정기간 동안 수학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주ㆍ부ㆍ현 소재 관학생들이지만 監生ㆍ貢生ㆍ貢士ㆍ 拔貢과 같이 國子監에서 수학했거나, 擧人과 같이 鄕試에 입격했던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각 지역의 紳士들로서 모두 중앙관료로의 진출을 위한 科擧 준비가 목적이었다. 광아서원은 광주성을 대표하는 省會書院으로서 국자감 다음의 지위를 가졌기에 관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많은 학생들이 집단으로 수학할 수 있었다. 경주 옥산서원은 동방오현으로 추앙받는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고, 건립직후 사액을 받으면서 국학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 조선의 서원은 원칙적으로 과거준비를 배척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제향과 강학을 통한 원생들의 인성함양을 기본으로 했지만, 과거가 있을 때에는 이를 준비하기 위한 居接을 시행하였다. 이때는 다른 고을과 원외의 유생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이외에도 각종 儒會의 장소로서 활용되면서 중국에 비하여 정치ㆍ사회적 활동이 두드러졌다. 서원의 출입자는 대부분 士族들이었으며, 중앙관료부터 일반 유생까지 다양하였다. 이것은 서원의 위상에 따라서 차이가 컸는데 옥산서원은 영남의 首院으로서 방문객이 매우 많았다. 19세기 옥산서원은 적서 간의 분쟁이 심화되었던 1820년대 초반, 1850년대 중반과 구인당을 중건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던 1840년에 향내외에서 많은 인사들의 방문이 확인된다. 지역별로는 경주가 가장 많으며, 이어서 영천ㆍ대구ㆍ영해ㆍ인동ㆍ선산ㆍ군위ㆍ성주 등 영남의 중부지역 인사들의 방문이 많았다. 특히 과거가 있던 해에는 사마시에 입격하거나, 문과에 급제한 후 내방하여 알묘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주로 일족과 동행하였다. 19세기 옥산서원을 방문하는 인물들은 이전 시기에 비하여 증가하였다. 이것은 양반수의 증가도 있지만 쇠퇴하는 서원의 교육적ㆍ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유지하려던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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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ontrôle bibliographique ouvert
DOI retrouvé dans Crossref DOI retrouvé ; titre concordant.
- Titre Crossref
- "Access to the seowon and its meaning from the19th century Korean-Chinese seowon data -Focused on Gyeongju Oksanseowonand Guangzhou Gwangseowon-"
- Date Crossref
- 30/06/2022
- Éditeur
- The Society of Korean Seowon
- Type
- journal-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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